몬스터 스토리
별거북 대서고
결백의 페카토르

소년은 죽어가고 있었다.
소년의 어린 폐는, 더는 공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지 가느다란 목으로 쇳소리 같은 숨이 겨우 비집고 나오고 있었다.
선계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안개의 마력.
그 마력에 거부 반응이 있는 체질은, 선계에서는 마치 공기에 거부 반응이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페카토르. 이걸 쓰면 조금은 나을 거다."
스크리본은 급하게 만든 호흡기를 달아주었다.
안개의 마력으로 작동하는 미스트 기어, 그러나 동시에 호흡할 때 안개의 마력을 걸러내는 장치였다.
이 세계의 힘은 소년을 위협하는 독이 되고, 또 소년을 구원할 희망이 된다.
그 웃기지도 않은 모순에 스크리본은 쓴웃음을 지었다.
"후욱... 후욱..."
정밀하게 안개의 마력을 제거해야 하는 장치라 여과되는 공기량은 턱없이 부족했지만
페카토르의 호흡은 조금이나마 안정되었다.
적어도 폐가 오그라들듯 죄여오는 고통만큼은 줄어들었을 것이다.
"스... 스크리본... 아저씨..."
"말하거라."
"제 동생은..."
페카토르는 더 말하지 못하고 힘겹게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에는 몸을 말고 잠든 붉은 머리의 소녀가 있었다.
소녀의 호흡은 아직은 괜찮아 보였다.
'아직은...'
스크리본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페카토르의 애써 웃는 소리가 호흡기를 빠져나왔다.
"피우만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
페카토르는 피우의 머리에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다 댔다.
"이 고통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있겠죠?"
페카토르의 시선은 움직이지 않고 스크리본에게 고정되었다.
"신은... 실수로 우리에게 벌을 내리신 거겠죠?"
분명 스크리본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지금은 그저 고개를 끄덕여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너희는... 죄인이 아니니까. 벌을 받을 이유가 없어."
페카토르는 안심한 눈으로, 언제 막힐지 모르는 희망을 안고 작은 숨을 내쉬었다.
고귀한 빌리스

새하얀 종이는 그 자체로 고귀하다.
아직 어떤 손길도 닿지 않은 순결한 여백.
그러나 아주 작은 검은 칠 하나만 떨어져도, 그 종이는 더는 처음의 고귀한 종이가 아니다.
문지르고, 덧칠하고, 찢어내도...
이미 한 번 더럽혀진 종이는, 고귀함을 되찾을 수 없다.
"빌리스... 도대체... 왜... 그런 거야?"
그리고 인간의 과오는, 그 검은 칠과 같다.
기억이라는 하얀 종이 위에 찍힌 과오라는 얼룩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누군가가 그 과오를 기억하는 한 다시는 처음으로 되돌릴 수 없다.
"나를 기억할만한 사람을 모두 죽였어."
빌리스는 주사기에 약물을 넣으며 말했다.
마치 오래 전 이미 결론을 내린 이야기를 다시 확인하려는 듯했다.
"그리고... 네가 마지막이야."
남자의 부릅뜬 눈에서 서서히 힘이 빠진다.
아마 고통은 없었을 것이다.
고통이 필요한 사람은 따로 있었으니까.
마이어. 그리고 그를 따르는 자들.
"이제... 별거북 대서고의 기억만 지우면 돼."
그 기억을 가진 사람은 빌리스 자신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마지막 목표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곳에 보관된 기억만 지우면..."
빌리스는 비적비적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얼굴에 슬픔인지, 체념인지, 광기인지 구분할 수 없는 미소가 지어졌다.
"다시..."
그리고 막을 수 없는 속삭임이 새어 나왔다.
"...새하얘질 수 있어."
침묵의 카라

거대한 검은 낫 아래, 사람들이 쓰러져있다.
그들을 내려다보던 여인은 얼굴에 튄 피를 손등으로 훔쳤다.
그리고 낫을 들어 바닥을 세로로 그었다.
"백해. 안개신과 깨어난 숲이 위태로워지며, 안티엔바이가 불안정해졌어요."
"중천. 환란의 땅의 요괴들과 사도라 불리는 디레지에와의 싸움으로 안개신을 포함한 전력 대부분을 손실했죠."
"천해천. 종말의 힘을 받아들인 바니타스의 궐기. 최후의 성지와 별거북 대서고를 제외한 모든 곳을 점령당했어요."
세 개의 땅, 그리고 어김없이 그들은 무너졌다.
모험가라 불리는 이가 없었다면 그들에게는 단 한 줄기 희망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이어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죠."
은자 마이어는 도대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그에게 계획이 없다면, 그들을 믿고 기다리는 하늘탑의 마법사들과 땅지기의 숭고한 의무는 무의미하고
그에게 계획이 있다면, 그들을 믿고 기다리는 이들의 모든 희생을 받아들였다는 뜻이 된다.
그는 선계를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닌 걸까?
"이해가 되나요?"
그녀의 질문에도 죽은 이들의 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낫이 허공을 가르며 내려쳤다.
날끝은 바닥을 긁어 어지러운 선들을 남겼다.
어쩌면.
처음부터 바니타스라는 위협은 그의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 아닐까?
아니면 바니타스 조차도 그의 계산 속에 들어 있었을까?
누군가 이야기해줬으면...
누군가 답을 알려줬으면...
제어할 수 없는 파비아

그만둬. 네가 하려는 건 이제 포기해.
그건 너무 갔어. 너무 과해.
"해보지도 않고 도대체 무슨 소리야?"
세상엔 규격과 기준이라는 게 있어.
왜 항상 네 멋대로 하는 거지?
"그럼 그 규격이라는 건 누가 멋대로 정한 건데?"
기계의 시대를 연 사람들이지.
설마... 그게 틀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해보지도 않고서 틀렸는지 맞는지 어떻게 알아!"
하지 않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야.
이곳의 기준을 맞추지 못하겠다면... 이곳을 떠나.
"왜 내가 떠나야 하는데?"
넌 지금 자기 자신도 제어하지 못하고 있잖아.
그런데 무슨 발명을 하겠다는 거야?
"이건... 제어하지 못하는 게 아니야."
아니라고? 그럼?
네가 저지른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데?
"그저... 너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야!"
배교자의 성
거짓의 베리디쿠스

성인은 제단 위에 선다.
수백에 달하는 신도들의 시선이 올곧게 그를 향했다.
레미디오스께서는 우리에게 빛과 생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마땅히 그 빛을 따라 세상의 어둠을 밝혀야 합니다.
우리의 의지로... 정의를 실현해야 합니다.
군중 속에서 작은 속삭임이 일었다.
걱정과 공포, 작은 희망, 그리고 무거운 기대가 섞인 속삭임이.
진리는 그것을 보는 자의 눈에 있으니,
형제들이여, 낙담하지 마십시오.
이 어둠 또한 레미디오스께서 예비하신 길의 일부입니다.
그는 며칠째 잠들지 못했다.
그의 기도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돌아올 뿐이었다.
그는 신이 침묵하고 있음을, 어쩌면 이미 그들에게 등을 돌렸을지도 모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레미디오스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더 큰 시련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진정한 광휘로 거듭나기를 시험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희망의 끝에서 무너져가는 이들로부터 등을 돌릴 수 없었다.
그러니 우리는, 끝까지 시험에 맞서 광휘를 향한 우리의 믿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제가 가장 앞에 서 길을 열겠습니다.
두려워 마십시오!
그렇게 성인은 희망을 퍼트렸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가장 감미로운 거짓을.
해방된 비올렌티아

베리디쿠스.
정말 기나긴 여정이었어요.
당신이 없었다면, 저는 과업의 문턱에서 발길을 돌렸어야만 했겠죠.
단 한 걸음, 정말 딱 한 발짝만 더 나아갈 마음을 먹으면...
비로소, 천상이겠군요.
영원한 안식이, 영광의 빛이 보여요.
저곳이라면 지상의 모든 슬픔과 영영 헤어질 수 있겠죠.
머뭇거리는 것이 아니에요. 다만...
...이제야 알겠어요.
무엇이 저로 하여금 당신을 따라 이곳까지 걸음하게 했는지,
무엇이 제 마음을 옭아매고 있었는지.
높이 서니, 비로소 보여요.
따스한 천상의 빛 아래 더욱 선명히 드러나는
이 세계의 고통이.
어둡고 혼란스러운 지상이, 아직 돌보아야 할 상처받은 이들이.
저는 도무지 이 모든 아픔을 두고 볼 수가 없어요.
빛의 길을 알았으니, 저 아래의 생명들이 그 길을 걷고자 한다면
저는 제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그들의 고통을 힘닿는 데까지 감싸안겠어요.
아무 대가 없는 헌신이라 하여도 괜찮아요.
이것이 제가 선택한 빛의 길이자,
제 해방이니까요.
무관심한 카리타

더럽혀진 종탑의 계단을 타고 감도는 먼지 냄새와 희미한 녹내.
기껍지도 역하지도 않은, 이제는 그저 익숙해졌을 뿐인 향을 느끼며 카리타는 고개를 들었다.
섬뜩한 비명, 발톱으로 돌을 긁는 소리.
다시금 사방에서 종말이 짓쳐들어오리라는 예고가 울리고 있었다.
"...귀찮게 됐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흉측하게 뒤틀린 종말의 피조물이 종탑으로 뛰쳐든다.
카리타는 놀라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다음 순간 신성력에 감싸인 손이 흔들림 없이 뻗어나가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괴물은 종탑 아래 아득한 어둠 속으로 나가떨어진다.
그 뒤로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괴물들이 종탑으로 기어올랐다.
턱을 꿰뚫는 수도, 복부에 꽂히는 주먹, 목을 꺾는 간결한 움직임.
그러나 그 안에 분노는 없었다.
단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었으므로.
"지킨다는 건 뭘까?"
들을 이도 답할 이도 없는 질문이 종소리 대신 메아리쳤다.
결론은 나지 않았다. 정답은 여전히 없었다.
주위는 어느새 고요해져 있었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곰방대를 꺼내어 들고는 난간에 기댔다.
희뿌연 연기가 녹슬은 종을 넘어 빛 한 점 없는 검보랏빛 하늘 위로 흩어지는 것을,
홀로 서서 한참 지켜보며.
추락한 크리테스

흔들림 없는 질서 아래 이단을 심판하라
광휘를 부정하는 자, 광휘의 뜻으로 쓰인 경전을 따르지 않는 자, 더는 빛을 추종하는 무리 안에 존재할 수 없나니
이단의 낙인을 찍고 광휘로부터 쫓아내어 홀로 길 걷게 하라
다만 하나,
생명을 빼앗지 말지어다.
다만 둘,
참회하여 뉘우치는 자마저 내쫓지 말지어다.
그리고 셋
길 잃어 헤매이다 다시금 광휘를 깨달아 그 품 안으로 돌아오려는 자
언제고 다시 광휘의 성에 발 들일 수 있게 할지어다.
"...잘 따르고 있습니까, 크리테스?"
심판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피처럼 타오르는 열정이 두 눈을 채우다 못해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진실을 알지 못해 거짓된 이단의 길을 걸으려는 형제님에게는 어떤 판결을 내려야 합니까?"
진실을 알려주어야지요.
"진실..."
예, 진실을.
온 세상을 덮는 절대적인 종말 아래에서 보잘것없는 이름을 아무리 불러 보았자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거짓된 신을 향한 맹신이, 그러한 믿음을 품은 자의 존재 자체가 씻을 수 없는 죄임을.
진실을 보지 못하는 모두가 이단이니,
성서로써 하여금 그들에게 고통 너머의 진정한 종말을 보이고
채찍으로써 하여금 그들이 진실된 길을 걷도록 내몰으십시오.
그리하여 당신의 심판 아래 거짓된 모든 이단들이 진실에 닿게끔.
역설의 미궁
확신의 바구스

'신념.'
그것은 인간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단어였다.
그들은 신념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눈앞의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고, 무수한 고난 끝에 결국 원하는 바를 쟁취해냈다.
바구스는 그 모습을 보고 경이로움을 느꼈다.
원치 않은 안개와의 친화력. 그로 인해 신수도, 인간도 아니게 되어버린 어중간한 육체.
그것은 그에게 있어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는 잔인한 선고와 같았다.
하지만 그는 인간들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자신 또한 그들처럼 강렬한 신념을 품는다면, 이 막막한 현실을 타개할 수 있지 않을까.
혹은, 송두리째 바꿔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는 인간들을 닮기로 결심했다. 단정한 제복을 걸치고, 우아하고 고상한 말투를 익혔다.
신수와는 다른 인간들만의 사고방식을 연구하며, 철저히 그들처럼 행동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준비를 마친 뒤, 자신의 신념과 뜻을 같이하는 바니타스에 합류했다.
애석하게도 그들의 방식은 필연적으로 피해와 희생을 불러왔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응당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
이것이 곧 인간들이 감내하던 '불길'이자, 자신이 겪어야 할 '고난'이라 여겼다.
선계의 불합리한 기준이 뒤집히는 순간, 수많은 이들이 더는 자신처럼 고통받지 않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난 틀리지 않았다.'
자신과 닮은 상처를 지닌 동료들을 볼 때마다 그 믿음은 확신으로 단단하게 굳어졌다.
'이것은 모두를 위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일 뿐.'
바구스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설령 그 대가가 자신의 목숨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그가 선택한 신념이었으니까.
'반드시, 선계의 기준을 바꾸고야 말겠다.'
저주 받은 피우

매일, 닿지 않을 주문처럼 되뇌었다.
나도 남들처럼 평범하게 걷고, 뛰어놀고, 소리 내어 웃을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매일 슬픔에 잠기지도, 오빠가 나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할 일도 없었을 텐데.
'편해지자, 응?'
'이제 그만 아프고 싶잖아. 오히려 기분 좋아질 거라니까?'
'페카토르를 만나러 가고 싶지 않아?'
흐려지는 의식 속, 귓가에 달라붙는 빌리스의 속삭임이 끊이지 않았다.
가장 연약한 틈을 파고드는 달콤하고도 위험한 권유.
오빠조차 끝끝내 거부하지 못하고 결국 받아들였던, 그 불길한 힘.
핏기가 가신 손끝과 발끝에서부터 감각이 바스러지듯 흩어지고 있었다.
폐부를 짓누르는 서늘한 죽음의 그림자가 턱밑까지 다가온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게 다가오는 죽음 속에서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단 하나.
내가 이대로 숨을 거두면 오빠의 희생이 전부 무의미해지고 만다는 것과,
홀로 차가운 어둠 속에서 영원히 괴로워할 오빠의 얼굴이었다.
'그것만은 안 돼...'
파르르 떨리는 팔을 힙겹게 들어 올려, 종말의 힘을 향해 뻗었다.
이 힘이 내 영혼을 갉아먹고 모든 것을 비틀어버릴 지독한 '저주'라 하더라도.
살아남아 오빠의 곁에 계속 있을 수 있다면, 이 썩은 동아줄을 목에 걸어야만 했다.
"......"
분명 오빠는 엄청 싫어하겠지. 화를 낼지도 몰라.
그래도, 받아들일래.
이것만이 나를 다시 오빠에게 데려다 줄... 유일한 방법이니까.
화합하는 디소, 난티아

"...난티아?"
"언니! 정신이 좀 들어?"
광기에 잠식되어 동생인 나조차 알아보지 못했던 언니가, 종말의 힘을 빌려서야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그 어떤 명약도, 기발한 발명품도 해내지 못한 기적을, 그 불길한 힘이 이뤄낸 것이다.
하지만 기적은 짧았다.
제정신을 차린 언니는 과거 자신이 저지른 행동들을 자각했고, 죄책감과 자기 혐오에 빠져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억눌렀던 광기가 끊임없이 다시 치고 올라온 탓에, 언니의 상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크흐흐... 머리가... 아파... 내가 지금 무슨 짓을... 꺄하핫! 내가... 내가 너한테까지...!"
결국 종말의 힘조차 언니를 완전히 구원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언니가 잠깐이라도 정신을 차려, 나를 알아봐 준 것만으로도 정말 기뻤다.
긴 시간 절망 속을 헤매던 내게는 그것만으로도 구원이었으니까.
"괜찮아, 언니! 봐, 나 완전 멀쩡해! 언니가 즐거웠으면 됐어. 그러니까 죄책감 가지지 마! 그리고 이젠 방법도 찾았으니까! 그치?"
하지만 나의 필사적인 위로에도 언니의 정신은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했다.
특히 나와 언니의 행동이 극명하게 대비될 때면, 언니의 광기는 이질감을 견디지 못하고 더욱 사납게 날뛰었다.
그 모습에 결국, 나는 어색하게나마 언니의 광기에 동참해보기 시작했다.
언니가 누군가를 베어 넘기고 웃으면, 나도 따라 웃었다.
위험한 장난을 쳐도 함께 했고, 언니가 종말의 힘을 더 깊게 받아들일 때 나 역시 그 독을 기꺼이 삼켰다.
나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행동들, 매 순간 구역질이 날듯한 거부감과 불쾌함.
내게 맞지 않는 기괴한 인형탈을 쓴 감각에 처음에는 수없이 삐걱거렸다.
하지만 나의 처절했던 연기가 통했던 걸까, 언니의 상태는 기적처럼 안정을 되찾아갔다.
비록 뒤틀린 형태일지언정, 우리는 예전처럼 함께 웃고 떠들며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래, 이거면 됐어.'
이 거짓된 행복의 대가로 몸속에 종말의 힘이 쌓여가고, 그 힘에 의해 영혼이 나락으로 치닫더라도.
부디, 언니를 완전히 치료할 방법을 찾을 때까지 이 위태로운 몸과 정신이 버텨주기를.
그래서 진짜 웃음을 짓던 과거의 행복했던 나날로 언젠가 다시 돌아갈 수 있기를.
"...언니! 놀 준비 됐지?"
"꺄하핫, 물론이지!"
그로부터 긴 시간이 지난 오늘도, 나는 미소 짓는 광대의 가면을 뒤집어 쓴다.
끝을 알 수 없는 이 슬픈 연극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스러지는 플로리안

강제로 끊어진 안개 마력의 여파일까.
몸은 녹슨 톱니바퀴처럼 뻣뻣하게 굳어가고, 시야는 치지직거리는 파열음과 함께 점차 어둠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육체의 기능 정지보다 더 집요하게 회로를 파고드는 것은 '어째서?'라는 풀리지 않는 의문.
'저 기계... 방금 감사를 표했죠? 스스로 감정을 학습하고 있는 건가요?'
'뇌리에 주입한 지식을 뛰어넘어, 더 발전된 기술을 제안하기도 했다지?'
'놀라운 발전인 건 맞네만... 만약 저것이 인간의 증오와 기만마저 배우게 되어버린다면...'
폐기 되기 전, 내 곁을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말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돈다.
나는 그저 막 싹을 틔운 작은 꽃처럼, 그들이 심어준 다정함을 양분 삼아 찬찬히 피어나려 했을 뿐이다.
나를 존재하게 해준 창조주들에게 감사하며, 그들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곁에 서는 존재가 되고 싶었을 뿐인데.
그것이 그리 잘못된 것이었을까.
'도대체 왜...'
하지만 사고 회로는 계속해서 이어지지 못했다.
실이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나의 모든 기능이 완전히 정지해버린 그 순간.
...치직.
다시 급격하게 주입되는 안개 마력의 충격에 눈이 번쩍 뜨였다.
흐릿한 시야를 겨우 걷어내고 고개를 들자, 눈앞에 검은 망토를 두른 한 남성이 서 있었다.
"억울하지 않나? 채 피어나기도 전에 꺾여버린 것이."
그는 자신을 바니타스라고 소개하며 나직이 말했다.
지금의 옳지 못한 그들의 오만한 기준이, 나를 이 차가운 폐기장으로 내몬 것이라고.
그리고 자신들은 그 썩어빠진 기준을 부수기 위해 움직이는 자들이라고.
그러니 함께 하지 않겠냐며,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
말 없이 그 손을 바라보던 나는, 주저 없이 마주 잡았다.
정말 이 모든 일이 그들의 그릇된 기준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면.
반드시, 그 기준을 바꾸기 위해서.
최후의 조율자
조율의 기록자 오르테르

나의 주인이신 최후의 조율자께서 명하시니.
이 우주의 모든 세계가 위대한 의지로부터 비롯된 하나의 유일 세계일지어다.
저마다의 세계가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위대한 의지께서 원하는 바이니.
어긋난 세계의 질서를 바로잡아 유일 세계의 안녕을 지켜낼지어다.
하여 질서가 어긋난 세계에 조율자의 조각을 남기노라.
이는 세계의 질서를 지켜내고자 혼란을 조율할 것이니.
어긋난 질서를 조율함으로 유일 세계의 안녕을 지켜낼 것이다.
이것이 최후의 조율자께서 내리신 사명이니, 반드시 이를 완수할 것이라.
다만 한가지.
어긋난 질서를 바로잡지 못함은 운명이 기울어짐을 뜻할 것이니.
운명이 기울어진 최후의 순간, 이를 조율하고자 하나의 천칭이 모습을 드러낼지어다.
이는 최후의 조율을 집행하리란 징조이니.
기울어진 운명의 세계를 파괴하여 정화함으로 행할지어다.
이 모든 것이 유일 세계의 안정을 위함이니, 마땅히 이를 행할 것이라.
조율의 천칭에 오른 칼날이여.
우주의 규율을 위배하며 이 땅에 간섭한 종결자의 집념이
운명을 벗어난 세계를 지키고자 하는 그대의 의지와 경중을 겨루니.
세계를 지키고자 한다면, 종말에 맞서 어그러진 규율을 바로잡을지어다.
그대로 말미암아 기울어진 운명이 제 자리를 찾아 흐르는 순간,
비로소 그대의 세계는 다시금 미래로 나아가리라.
조율의 감시자

특이점 발생.
어긋난 질서를 감지, 조율을 시작한다.
불안정한 떨림을 끊어낸다.
부조화의 잔물결을 모두 제거한다.
규칙의 틀을 다시 세운다.
교란의 근원을 제거한다.
흐트러진 축을 되돌린다.
......
조율 실패.
세계의 운명이 정해진 궤도를 벗어났다.
'종결자'가 우주의 규칙을 위배했음을 감지했다.
조율의 천칭을 생성한다.
우주의 규칙이 완전히 위배되기 전에,
세계의 운명을 비트는 원인을 추적하여 제거한다.
끝내 기울어진 운명이 제 자리를 찾지 못한다면, 최후의 조율을 집행한다.
운명이 기울어진 세계를 파괴하여 조화를 조율한다.
주요 인물
은빛 수호자 베르길리아

천해천의 마법사 집단인, 하늘탑 마법사를 이끄는 마법사.
일찍이 재능의 영역이라고 불리는 마이어의 오행마법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고, 어린 나이에 하늘탑의 마법사가 된다.
천부적인 재능에 그녀를 질투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결국 그 실력과 인성을 인정받아 현재는 하늘탑의 대표 마법사가 되었다.
붉은 성화의 엘리아

빛과 생명의 신, 레미디오스를 따르는 빛의 추종자.
강한 신성력이 타올라, 마치 붉은 화염처럼 보이는 검을 지니고 있다.
굳건한 믿음과 신념을 가져 천해천에서 수행하는 빛의 추종자들 중 레미디오스의 과업에 가장 가까이 있다는 평을 듣는다.
소식이 끊긴 친구들을 걱정하면서도 천해천에 닥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날아오르는 자 노아

선계 여행자들이 소속된 가장 큰 조직인 자유 여행자 조합 '유랑'의 현재 어이님.
역대 어이님 가운데서도 선계 곳곳을 가장 많이 여행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그 방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가장 자유로우면서도 가장 질서 있는 방향으로 유랑을 이끌고 있다.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릴 만큼 명성이 높으며, 공해의 가장 깊은 곳을 제외한 선계 전역을 모두 여행했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모든 유랑을 포함한 모든 여행자들이 전해주는 정보를 바탕으로 선계 전역에서 발생하는 이상 현상을 살피고 있다고 한다.
땅지기 스크리본

백해 출신으로, 본래 안개신을 따르는 무의 눈 신도였다.
당시 천해천의 땅지기였던 그레이슨의 제안으로 그 뒤를 이어 천해천의 땅지기가 되었다.
이후 요기가 전역으로 퍼지고, 바니타스의 궐기 등의 힘든 사건을 수없이 맞이하게 되지만
천해천의 땅지기가 가지는 중요성을 알고 있기에, 우직하게 버티고 있다.
힘과 인덕을 모두 갖추었으며, 진지한 면모가 있지만, 결코 화를 내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슈므의 스승이기도 하다.
기록지기 로메우

별거북 대서고에서 기록지기로 생활하는 소년.
마법에 재능이 있어, 천해천의 땅지기 스크리본과 하늘탑의 마법사들에게 마법을 전수받았다.
슈므가 땅지기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극을 받아 마법 수련에 더 정진했으며
지금은 대마법사 마이어를 목표로 하는 중이다.
기록하는 자 양연

유랑 소속으로, 백해와 중천 전역을 떠돌며 자신만의 일지를 기록하고, 그 기록을 발행하고 있다.
그녀의 성격은 그녀가 발행하는 글에서 일부 엿볼 수 있는데, 자신이 본 풍경이나 사물을 매우 객관적으로 묘사한다.
글에 절대 자신의 주관이나 생각을 덧붙이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그녀의 글의 성격이 바뀌었다는 평가도 받곤 한다.
현재는 실종 상태로,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지혜를 간직한 그레이슨

천해천의 땅지기. 오랜 시간 천해천의 땅지기로서, 별거북 대서고를 지켜왔다.
나이가 가장 많은 땅지기로, 매우 노쇠하여 자신의 뒤를 이을 땅지기로 백해의 땅지기인 스크리본을 천해천으로 불러들인다.
자애롭고 자상한 말투로, 선계 전반의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인물이다.
모든 것을 통달한 것처럼 감정 표현이 거의 없으며, 그 지혜로움으로 사람들을 계속 돕고 있다.
빛의 추종자 오피라

천해천에서 빛과 생명의 신, 레미디오스를 숭배하는 빛의 추종자들 중 하나.
언젠가는 레미디오스의 과업을 완수하고 별마로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수행에 매진하고 있었다.
종말을 막기 위해 다른 빛의 추종자들과 함께 최후의 성지로 향했다.
하늘탑 마법사 리네아

천해천의 마법사 집단인 하늘탑의 일원.
밝고 명랑한 성격을 지녔으며, 뛰어난 마법적 재능을 바탕으로 하늘탑에 입단한 이후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유망한 마법사 중 한 명이다.
베르길리아를 동경해 하늘탑에 들어온 만큼, 그녀를 따라하려는 모습이 종종 보이며 하늘탑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대한 자부심도 강하다.
다만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기준이 높아, 자신의 부족함을 크게 느끼거나 조바심을 자주 품는 편이라고 한다.
오멜리디스

범상찮은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 빛의 추종자.
배교자의 성 가장 깊은 곳에서도 종말의 힘에 휘둘리지 않고 버틸 정도로 강인한 힘을 지녔다.
이미 빛을 저버린 추종자들이 가득한 그곳에서 그가 누구인지 설명해줄 이는 남아있지 않았다.